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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정안밤톨이마을 전경사진입니다.
알밤사진

한국에서는 정확히 언제부터 밤나무를 심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2000년전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몇알의 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1700년 전인 진나라 때 편찬된 [삼국지]의 마한(馬韓)이란 대목에서는 ‘마한에서 굵기가 배만한 밤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약 1550년전 송나라때의 후한서(後漢書)라는 책에서도 마한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며 길쌈을 하고 큰 밤을 생산하고 있는데 크기가 배만하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당나라 위징(魏徵)의 수서(隨書)나 이연수(李延壽)의 북사(北史)라는 책에도 백제나라에는 큰 밤이 생산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는 쌀없이는 지낼 수 있어도 장작없이는 겨울을 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온돌의 많은 연료가 필요하고, 그 때문에 임목의 남벌이 행해졌다. 그 결과 다른 수종의 큰 나무는 거의 없어진 반면에 밤나무는 아주 좋은 대경목도 남아 있어 이점으로 미루어 보아 옛날부터 밤나무를 귀중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밤은 대추, 잣과 함께 관혼상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경기도의 밤 산지인 시흥군 북면의 일부, 신동면, 과천면, 남면, 서이면의 일대는 고구려시대에 율목군이라 불렀으며 신라시대 경덕왕에 의해 율진군으로 개칭되었고 그후 고려시대에 과주군, 조선시대에 과천군이라 불렀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밤을 산업사로 기재하지는 않았지만, 법전으로서 밤을 보호권장한 기록이 남아있다. 즉 고려시대 睿宗(예종)13년(1118년) 및 明宗18년에 뽕나무, 옻나무, 닥나무, 참나무, 배나무, 대추나무등과 함께 토지의 성질에 따라 식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1485년)에 의하면 관리에게 植栽管理를 시키고 이에 소홀히 한 사람은 처벌하였다. 또한 옻나무, 뽕나무 등과 함께 밤나무를 벌채한 자도 처벌하였다. 이조 22대 영조대왕은 산업을 진흥시킨 왕으로 栗木敬査官에게 밤 산지를 조사시켰던 일도 있다. 그리고 경국대전에 이어 성종23년(1492년)에 속대전이 편찬되었는데, 이를 보면 밤생산 농민들은 국가에 제공하는 부역을 제외시켜 주었는데, 잡역이 면제된 곳들은 경기도 과천, 고양, 강화, 양주, 남양, 부평 등지로서 옛날부터 밤생산지로 유명하였다.

정안 밤톨이 제품사진

또한 밤나무 목재가 귀중하였으므로 이를 생산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나라에서 밤나무 보호림(栗木封山)을 지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밤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고 옛날부터 보호하였기 때문에 생산이 많이 되었으며, 이조시대 말기에는 밤나무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으므로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유목은 잘라버리고 나무가 노쇄하여 고사하여도 보식을 하지않게 되어 밤나무림이 아주 황폐해졌었다. 특히 서울(경성)부근의 폐해가 혹심했었다. 그 후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의 시대에는 철도건설 때문에 많은 벌채가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을 보면 ‘해충이 벼를 해쳤으니 밤, 도토리를 채취해 흉년에 대비해야 한다’고 나와 있으며, ‘흉년 때 밤과 상수리를 주워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산과 등을 불태우는 일을 금해야 한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밤은 구황식량으로 귀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보면 ‘군사들이 마을에 심은 밤나무를 모두 베어서 백성을 해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내용을 보면 아마도 백성들은 밤나무를 집 근처에 많이 심었던 것으로 보여진다.